수영장의 문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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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달자립센터 작성일19-11-28 03:32 조회4,690회 댓글0건본문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9-11-22 15:08:461
그날 밤 나는 인생에서 가장 아픈 밤을 보냈다. 시신경이 타들어가 빛을 잃은 날도, 디스크로 기다시피해서 병원에 갔던 날도, 살면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고통의 죽을만큼 아팠던 밤들도 그날 밤 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생애 가장 아팠던 그날 밤, 나는 죽어서라도 살고 싶었고, 그러기로 결심했다.그날 밤 나는 비 오는 남산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남산 산책로는 국내에서 시각장애인이 혼자 산책하기 좋은 몇 안 되는 곳이다.
당시 대학 1학년이었던 나는 반수에 성공하여 새로 입학한 대학교에서 막 첫 학기를 마친 상황이었다. 가고 싶었던 학교에서의 첫 학기를 무사히 마쳤으니 기쁘고 즐거웠어야 하는데, 인간의 욕심은 참 끝이 없나보다.
나에게 주어진 첫 방학은 시청각 장애 학생이 과제와 시험으로부터 겪는 극도의 스트레스에서 해방 되었다는 느낌... 그 이상도 아니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방학하고 처음 2주간은 밤낮이 바뀔 정도로 신나게 놀았지만, 어느순간 부터 외롭고 애타는 시간으로 변해버렸다.
그 이유는 대학교에서 만난 비장애인 친구들은 첫 사회경험이라면서 알바나 인턴십을 하고, 불타는 청춘을 운운하며 국내외 여행을 다니거나, 하다못해 학기 중에 못한 체력관리를 할 요량으로 스포츠 센터에 등록했다고들 하는데, 또래들이 한다는 활동 중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하고싶었고, 그래서 비장애인 친구들이 부러웠던 것은 알바였다.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거나, 옷가게에서 손님을 만나고, 아님 패스트푸드점에서 바닥이라도 밀며 일해보고 싶었다. 결코 돈을 벌고싶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 사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시청각장애인인 나를 아르바이트생으로 써줄만한 곳은 없었다. 그래서 고민끝에 내가 관심을 돌린 것은 스포츠 센터 등록이었다.
잠깐 나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나는 운동에 상당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 보기보다 팔굽혀 펴기를 못하고, 길이에 비해 튼튼하지 못한 다리를 가진 탓일 수도 있고, 이렇다 할만큼 잘할 수있는 운동이 없어서 그럴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맹학교 졸업생이라면 어지간히 운동 신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한번쯤 들어가봤을 구기 종목 서클에 자원까지 했는데도 단칼에 거절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구기 종목인만큼 방울이 들어간 공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하는데 청각장애도 있으니 현실적으로 곤란하다는 서클 담당 선생님의 거절사유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옳았다.
그러나 비교적 좋은 체격을 타고나 한번쯤 격렬한 승부를 겨뤄보고 싶었던 나로서는 그것이 못내 한으로 남은 것 같다. 그 한은 지금까지도 꿈으로 남아있다. 헬스장 대신 수영장을 고집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헬스장에 다니면 건강한 몸을 만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승부를 겨루는 경기는 할 수 없는 반면, 수영을 배우면 경기 출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런데 웬 걸, 청각장애로 인해 전화 통화가 어려운 나를 대신하여 가족들이 몇몇 수영장에 전화 문의를 하면서 나는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니, 실은 각오하고 있던 난관이었는데, 거기에 부딪히며 느낀 충격이 예기치 못한 수준으로 강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때 나는 수영장 다섯곳으로 부터 거절을 당해야만 했다. 일단 수영장에 들어가서 풀장에 입수해 탈의실에서 나를 도와줄 수 없으니 반드시 동성 보호자와 동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입수 전 샤워만 하고 수영이 끝나면 얼른 옷만 갈아입고 나올테니 수영장 안으로 입장할 때 5~10분, 퇴장할 때 5분 가량 도와줄 수 없는지 사정해보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수영장에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스무 살이 넘은 청년이 되어서까지 나는 보호자를 동반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느낀 무력감이 충격이었다. 다섯 곳 중 설마 한 곳도 안 받아주겠나 했던 나의 예상이 꼴사납게 빗나간 것이 충격이었다.
사립도 구립도 같은 소리를 하는 마당에 이게 차별받은 건 맞는 것 같은데... 어디다 호소해야할 지 몰라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이 충격이었다.
그리고 고작 탈의실 하나를 통과하지 못해서, 탈의실이 건널 수 없는 38선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충격이었고, 무엇보다도 그 앞에서 깨달은 냉혹한 현실이 충격이었다.
그랬다. 그것이 현실이자 삶이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나는, 바로 시청각장애인이었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장애인이었고, 그건 바로 나였다.
냉혹함을 넘어 잔인한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몇 날 며칠이 걸렸다. 그냥 수영장에 못 가게 되었다는 아쉬움으로 끝났을 수도 있는 일이 오만가지 자문자답으로 이어졌고, 나로 하여금 심각한 각성 상태에 빠지게 했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마도 나흘에서 닷새를 그렇게 밤낮을 불규칙적으로 자다 일어나 멍해 있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다 털어버리기로 한 그날, 새벽녘 비 소식이 있는 줄 알면서도 날짜가 바뀌는 시간에 남산 산책로를 찾았고, 그저 평범한 비가 유난히도 굵고 줄기찬 하늘의 울음으로 다가오면서 감정이 북받치는 걸 어찌하지 못했다.
아니, 그건 단순한 설움의 북받침이 아니었다. 장애인이 되었을 때조차 알지 못했던 충격받을 당시에는 미처 신경쓸 겨를이 없었던, 엄청난 고통이었다. 20대 초반의 장애 청년이 이제 부모님의 보호로부터 벗어나 살아가야 할 세상이 얼마나 험난할지를 생각하며 현실보다 더한 상상에서 느낀 괴로움이었다. 그리고 그런 고통과 괴로움으로 죽을만큼 힘들더라도 시민으로, 국민으로,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자 그렇게 살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다. 전반적으로 볼 때, 분명 세상은 더 나아졌다. 그건 나의 평범한 일상도 마찬가지다. 단언컨대 개인적으로 5년전에 비해 나빠진 거라면 체중이 10kg 이상 증가했다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5년 전에 비해 나아졌다고 해서 내 삶에 대단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5년 전 수영장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여전히 가고 싶은 곳에 자유롭게 갈 수 없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지 못한다.
불과 2년전 대학졸업 논문을 쓸 때 읽어야하는 자료를 점자나, 파일로 만들어 놓은 책이 없어 내게는 그저 조용한 공간에 지나지 않는 그 아무런 의미가 없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외계인이 되어버린 상상을 하기도 하였다.
나에게는 눈과 다름이 없는 안내견과 동행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손님 취급을 하지 않는 식당 때문에 차마 고발은 하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얼마나 앓고 있는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발달장애인이 수영장에 갈 때 반드시 동성 지원인이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한 기관측이 패소한 사례가 있었고, 시각장애인 놀이 기구 제한은 차별이라는 배상 판결이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점점 시청각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 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결코 가까워지지 않지만,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었던 나와 세상과의 사이, 나와 같은 장애인들과 세상과의 사이, 우리와 세상과의 사이는 그렇게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한 걸음이 가까워지기까지는 누군가의 피눈물이 쏟아졌겠지만,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고 있음을 나는 세상의 변화를 통해 느낀다. 그리고 믿는다. 세상은 앞으로도 더 나아질 것을.
*이 글은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시청각장애인이자 시청각장애인의 권익옹호를 위한 손잡다 대표로 활동 중인 조원석 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인생에서 가장 아픈 밤을 보냈다. 시신경이 타들어가 빛을 잃은 날도, 디스크로 기다시피해서 병원에 갔던 날도, 살면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고통의 죽을만큼 아팠던 밤들도 그날 밤 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생애 가장 아팠던 그날 밤, 나는 죽어서라도 살고 싶었고, 그러기로 결심했다.그날 밤 나는 비 오는 남산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남산 산책로는 국내에서 시각장애인이 혼자 산책하기 좋은 몇 안 되는 곳이다.
당시 대학 1학년이었던 나는 반수에 성공하여 새로 입학한 대학교에서 막 첫 학기를 마친 상황이었다. 가고 싶었던 학교에서의 첫 학기를 무사히 마쳤으니 기쁘고 즐거웠어야 하는데, 인간의 욕심은 참 끝이 없나보다.
나에게 주어진 첫 방학은 시청각 장애 학생이 과제와 시험으로부터 겪는 극도의 스트레스에서 해방 되었다는 느낌... 그 이상도 아니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방학하고 처음 2주간은 밤낮이 바뀔 정도로 신나게 놀았지만, 어느순간 부터 외롭고 애타는 시간으로 변해버렸다.
그 이유는 대학교에서 만난 비장애인 친구들은 첫 사회경험이라면서 알바나 인턴십을 하고, 불타는 청춘을 운운하며 국내외 여행을 다니거나, 하다못해 학기 중에 못한 체력관리를 할 요량으로 스포츠 센터에 등록했다고들 하는데, 또래들이 한다는 활동 중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하고싶었고, 그래서 비장애인 친구들이 부러웠던 것은 알바였다.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거나, 옷가게에서 손님을 만나고, 아님 패스트푸드점에서 바닥이라도 밀며 일해보고 싶었다. 결코 돈을 벌고싶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 사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시청각장애인인 나를 아르바이트생으로 써줄만한 곳은 없었다. 그래서 고민끝에 내가 관심을 돌린 것은 스포츠 센터 등록이었다.
잠깐 나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나는 운동에 상당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 보기보다 팔굽혀 펴기를 못하고, 길이에 비해 튼튼하지 못한 다리를 가진 탓일 수도 있고, 이렇다 할만큼 잘할 수있는 운동이 없어서 그럴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맹학교 졸업생이라면 어지간히 운동 신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한번쯤 들어가봤을 구기 종목 서클에 자원까지 했는데도 단칼에 거절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구기 종목인만큼 방울이 들어간 공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하는데 청각장애도 있으니 현실적으로 곤란하다는 서클 담당 선생님의 거절사유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옳았다.
그러나 비교적 좋은 체격을 타고나 한번쯤 격렬한 승부를 겨뤄보고 싶었던 나로서는 그것이 못내 한으로 남은 것 같다. 그 한은 지금까지도 꿈으로 남아있다. 헬스장 대신 수영장을 고집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헬스장에 다니면 건강한 몸을 만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승부를 겨루는 경기는 할 수 없는 반면, 수영을 배우면 경기 출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런데 웬 걸, 청각장애로 인해 전화 통화가 어려운 나를 대신하여 가족들이 몇몇 수영장에 전화 문의를 하면서 나는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니, 실은 각오하고 있던 난관이었는데, 거기에 부딪히며 느낀 충격이 예기치 못한 수준으로 강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때 나는 수영장 다섯곳으로 부터 거절을 당해야만 했다. 일단 수영장에 들어가서 풀장에 입수해 탈의실에서 나를 도와줄 수 없으니 반드시 동성 보호자와 동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입수 전 샤워만 하고 수영이 끝나면 얼른 옷만 갈아입고 나올테니 수영장 안으로 입장할 때 5~10분, 퇴장할 때 5분 가량 도와줄 수 없는지 사정해보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수영장에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스무 살이 넘은 청년이 되어서까지 나는 보호자를 동반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느낀 무력감이 충격이었다. 다섯 곳 중 설마 한 곳도 안 받아주겠나 했던 나의 예상이 꼴사납게 빗나간 것이 충격이었다.
사립도 구립도 같은 소리를 하는 마당에 이게 차별받은 건 맞는 것 같은데... 어디다 호소해야할 지 몰라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이 충격이었다.
그리고 고작 탈의실 하나를 통과하지 못해서, 탈의실이 건널 수 없는 38선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충격이었고, 무엇보다도 그 앞에서 깨달은 냉혹한 현실이 충격이었다.
그랬다. 그것이 현실이자 삶이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나는, 바로 시청각장애인이었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장애인이었고, 그건 바로 나였다.
냉혹함을 넘어 잔인한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몇 날 며칠이 걸렸다. 그냥 수영장에 못 가게 되었다는 아쉬움으로 끝났을 수도 있는 일이 오만가지 자문자답으로 이어졌고, 나로 하여금 심각한 각성 상태에 빠지게 했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마도 나흘에서 닷새를 그렇게 밤낮을 불규칙적으로 자다 일어나 멍해 있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다 털어버리기로 한 그날, 새벽녘 비 소식이 있는 줄 알면서도 날짜가 바뀌는 시간에 남산 산책로를 찾았고, 그저 평범한 비가 유난히도 굵고 줄기찬 하늘의 울음으로 다가오면서 감정이 북받치는 걸 어찌하지 못했다.
아니, 그건 단순한 설움의 북받침이 아니었다. 장애인이 되었을 때조차 알지 못했던 충격받을 당시에는 미처 신경쓸 겨를이 없었던, 엄청난 고통이었다. 20대 초반의 장애 청년이 이제 부모님의 보호로부터 벗어나 살아가야 할 세상이 얼마나 험난할지를 생각하며 현실보다 더한 상상에서 느낀 괴로움이었다. 그리고 그런 고통과 괴로움으로 죽을만큼 힘들더라도 시민으로, 국민으로,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자 그렇게 살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다. 전반적으로 볼 때, 분명 세상은 더 나아졌다. 그건 나의 평범한 일상도 마찬가지다. 단언컨대 개인적으로 5년전에 비해 나빠진 거라면 체중이 10kg 이상 증가했다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5년 전에 비해 나아졌다고 해서 내 삶에 대단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5년 전 수영장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여전히 가고 싶은 곳에 자유롭게 갈 수 없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지 못한다.
불과 2년전 대학졸업 논문을 쓸 때 읽어야하는 자료를 점자나, 파일로 만들어 놓은 책이 없어 내게는 그저 조용한 공간에 지나지 않는 그 아무런 의미가 없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외계인이 되어버린 상상을 하기도 하였다.
나에게는 눈과 다름이 없는 안내견과 동행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손님 취급을 하지 않는 식당 때문에 차마 고발은 하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얼마나 앓고 있는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발달장애인이 수영장에 갈 때 반드시 동성 지원인이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한 기관측이 패소한 사례가 있었고, 시각장애인 놀이 기구 제한은 차별이라는 배상 판결이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점점 시청각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 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결코 가까워지지 않지만,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었던 나와 세상과의 사이, 나와 같은 장애인들과 세상과의 사이, 우리와 세상과의 사이는 그렇게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한 걸음이 가까워지기까지는 누군가의 피눈물이 쏟아졌겠지만,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고 있음을 나는 세상의 변화를 통해 느낀다. 그리고 믿는다. 세상은 앞으로도 더 나아질 것을.
*이 글은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시청각장애인이자 시청각장애인의 권익옹호를 위한 손잡다 대표로 활동 중인 조원석 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