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들 "내 손으로 대통령 뽑고 싶다"…곳곳에 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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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달자립센터 작성일22-02-02 23:57 조회1,04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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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보조 제외돼 차별"…선관위 "관련 매뉴얼 개정할 것"
그림·사진 투표용지, 알기 쉬운 선거공보물 도입도 필요
"혼자 걸어갈 수 있으면 투표보조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있었던 지난해 4월27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의 한 투표소를 찾은 발달장애인 박정훈씨(가명)와 그의 어머니 이선영씨(가명)는 자신들을 가로막는 투표사무원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혼자서 투표를 하기 어려운 정훈씨를 위해 그동안 선영씨가 투표보조를 해왔는데 이제부터는 기표소에 함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영씨는 이전 선거에서도 자신이 아들을 위해 투표보조를 해주었다고 항변했지만 투표사무원은 '신체장애와 시각장애 이외에는 혼자 투표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답답한 마음에 선영씨는 마포구 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 "안타깝지만 신체장애와 시각장애인만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정훈씨가 혼자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면 심하게 불안감을 느껴 몸을 떨었기에 홀로 투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선영씨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도 전화를 걸어봤지만 담당 직원은 정훈씨가 혼자 걸어서 기표소까지 갈 수 있는지만 묻고는 혼자 걸어갈 수 있다면 투표보조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선영씨는 자신이 들어갈 수 없다면 선관위 직원이라도 가서 투표를 도와달라고 했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투표사무원은 임시 기표소에서 박씨와 A씨가 투표 연습을 하도록 안내해 주었다. 하지만 연습을 마치고 혼자 기표소에 들어간 정훈씨는 스스로 제대로 투표를 했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다시 걸어 나왔다. 투표용지도 제대로 접히지 않아 펼쳐진 상태였다.
비장애인이었으면 10분이면 끝났을 투표가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저녁 약속이 있었던 선영씨는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들의 장애를 구구절절 설명하며 혼자 투표를 하지 못하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굴욕스러웠다. 또 자신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아들의 표정도 불안감에 젖어가는 것 같았다.
◇지적·발달장애 투표보조 제한한 선관위…"현장 매뉴얼 변경할 것"
선영씨와 정훈씨가 투표장에서 굴욕스러웠던 순간을 마주해야 했던 이유는 중앙선관위의 장애인 투표보조 관련 매뉴얼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선관위는 2016년부터 발달장애인이 보호자나 보조인의 도움을 받아 기표소에서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현장 매뉴얼을 운영해왔다. 하지만 2020년부터 이 매뉴얼이 변경되고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는 장애인의 대상에서 '지적·발달장애 포함'이라는 문구가 삭제되면서 논란을 빚었다.
정훈씨뿐만 아니라 다수의 발달장애인들이 투표소 현장에서 투표보조를 거부당해 결국 투표를 하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투표보조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당일 알게 된 발달장애인들이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기표소에 들어가 가만히 서 있다가 나오거나, 모든 후보자의 이름에 기표를 하고 나왔다는 증언들이 나오기도 했다.
논란에 대해 선관위는 "'지적·자폐성 장애 포함' 문구를 선거지침에서 삭제해 발달장애인이 투표보조를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지적·자폐성 장애인 중 장애 정도에 따라 스스로 투표가 가능한 사람까지 동반인의 보조를 받게 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 침해 등을 방지하기 위해 관련 문구를 제외한 것"이라고 해명에 나섰다.
선관위의 입장은 공직선거법상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해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의 경우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해 투표를 보조할 수 있지만 지적·발달장애인의 경우 스스로 투표가 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면 자기결정권 침해를 막기 위해 투표보조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애계에서는 어떤 발달장애인이 스스로 투표를 하는 것이 어려운지 명확한 기준 없이 투표소의 투표사무원이 투표보조 필요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은 결국 정훈씨의 사례처럼 발달장애인이 투표에서 배제되는 상황을 계속해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고 반발했다.
앞서 국가인권위원회의 경우에도 지난해 3월 선관위가 투표 발달장애인에 대한 투표보조를 불허한 것을 '차별행위'로 판단하기도 했다. 인권위는 "공직선거법에서 시각 및 신체장애로 인해 기표행위가 어려울 때는 투표보조 동반을 허용하고 있다고 하나 이 규정이 다른 장애 유형을 배제하여 참정권을 제한하고자 하는 취지의 규정이라고 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장애계 반발과 인권위의 권고에도 그동안 선관위가 관련 매뉴얼을 수정하지 않자 지난해 말 정훈씨와 그를 돕는 장애인단체들은 올해 20대 대통령선거와 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만이라도 선관위가 투표 관리 매뉴얼을 수정해 발달장애인도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
가처분 신청 제기로 재판이 시작되고 언론의 관심이 쏠리자 선관위 측은 '지적·발달장애인 포함'이라는 문구를 다시 매뉴얼에 넣지는 않겠지만 장애인 당사자가 투표보조를 원한다는 의사를 밝히면 최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쪽으로 매뉴얼을 변경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발달장애인이 투표소에서 원활하게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는 불식되지 않고 있다. 정훈씨의 재판에 신청대리인으로 참여한 이주언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선관위가 전향적으로 매뉴얼을 개정하려는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면서도 "보조 희망 여부를 어떻게 현장에서 판단한다는 것인지, 어떨 때 과도한 간섭으로 제지당할 수 있는 것인지 매뉴얼 내용만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워 혼란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림투표 용지도입, 알기 쉬운 선거공보물도 필요"
한편, 장애계는 발달장애인들의 온전한 참정권이 보장되기 위해서 투표보조뿐만 아니라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고 보고 있다. 이에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와 한국피플퍼스트 등의 단체는 '공직선거에 있어서 발달장애인의 정보접근권 보장을 위한 차별구제 청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소송에서 이들 단체들은 그림·사진을 포함한 투표용지 도입,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물 마련 등을 요구할 방침이다.
발달장애인들의 경우 비장애인들보다 인지능력이 낮고 글을 읽지 못하거나 읽어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장애계에서는 오랫동안 투표용지에 후보자의 사진이나 정당을 상징할 수 있는 그림을 넣는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 실제 스코틀랜드, 인도, 아일랜드, 이집트,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국가에서는 투표용지에 후보자들의 사진을 인쇄해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을 쉽게 알아보도록 하고 있다.
같은 이유로 선거공보물의 경우에도 발달장애인에게는 후보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기존의 선거공보물은 각종 함축적인 한자어, 개념어, 긴 줄글들로 채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일상적인 대화나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글자를 어느 정도 읽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 발달장애인들도 "공보물에 나온 정책 내용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소송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직 예견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요구가 가장 가까운 선거인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행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조치에는 한계가 있고 결국 법과 제도를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그림이나 사진을 게재하면 후보자간의 유불리를 따지게 돼 문제가 될 수 있다.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되면 다룰 수 있는 문제"라며 투표용지를 바꾸기 위해서는 관련 법과 규정이 변경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이 관계자는 인쇄 장비 변경 등 현실적인 요인들을 고려했을 때도 그림과 사진이 들어간 투표용지를 당장 도입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쉬운 선거공보물' 마련도 현재 상황에서는 각 후보가 발달장애인들을 배려해 쉬운 공약집을 만들어 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를 강제해 모든 후보가 쉬운 공보물을 만들게 하기 위해서는 역시 공직선거법 등의 법 개정이 필요하다.
출처:NEWS1 뉴스